Martes, Pebrero 12, 2013

[스포츠인앤아웃]유럽 10년 박지성, 한국 축구를 바꿨다


박지성(오른쪽)이 2003년 1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에인트호번 입단식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데뷔전을 잘 해냈다."

박지성의 유럽 첫 경기였던 2003년 2월9일 발베이크전 직후 거스 히딩크 에인트호번 감독은 "첫 공식 경기인데도 플레이가 좋았다. 미드필드 압박 수비가 훌륭했고 볼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데뷔전의 달콤함은 금세 씁쓸한 시련으로 바뀌었고 그는 네덜란드 생활 초반 홈팬들의 거센 비난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박지성은 특유의 폭넓은 활동량과 공간 창출 능력, 헌신적인 수비 등을 앞세워 이를 이겨냈고 2005년부터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는 10년 동안 유럽에서 한국 축구, 더 나아가 아시아 축구의 아이콘으로 롱런했다.

◇박지성=한국+아시아 축구 역사
'박지성이 가는 길'이 한국 축구와 아시아 축구의 역사였다. 10년간 그가 올린 317경기 44골 38도움엔 많은 기록들이 숨어있다. 그는 유럽축구연맹(UEFA) 최고 클럽대항전인 챔피언스리그 본선 무대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골을 넣었다. 에인트호번 소속이던 2005년 5월5일 AC밀란과의 4강 2차전에서 터뜨린 선제골은 챔피언스리그 골문이 한국 선수 발 끝에서 처음으로 열린 날이었다. 그 해 7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은 박지성은 이듬해 4월6일 강호 아스널전에서 한국 선수로는 프리미어리그 첫 골을 터뜨렸고 2007년 5월엔 프리미어리그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2009년 5월28일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FC바르셀로나와의 맞대결에 선발 출격, 아시아 선수로는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에 서는 기록을 남겼다. 최근 자리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QPR로 이적한 지난해 8월엔 아시아 선수 가운데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 주장에 임명되어 5개월간 활동했다.


박지성이 2005년 7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이적하며 홈 구장인 올드트래포드에서 입단식을 갖고 있다.(스포츠서울DB)

◇우승 또 우승…한국 팬들은 즐거웠다
박지성은 강팀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숨은 공신 역할을 했다. 때문에 그의 축구 인생엔 우승컵이 많았다. 박지성이 들어올린 트로피의 개수는 그가 얼마나 팀이 필요로 하는 플레이어였는가를 설명해준다. 유럽 첫 시즌이었던 2002~2003 시즌 네덜란드 정규리그 우승을 맛 본 박지성은 2004~2005 시즌 네덜란드 정규리그와 FA컵을 모두 석권하며 2관왕의 기염을 토했다.

2005년 7월 맨유로 옮긴 뒤 그의 우승 기록은 새 장을 열었다. '러시아 부호'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머니파워에 밀려 첼시에 패권을 서서히 내주던 맨유는 박지성의 입단 두 번째 시즌인 2006~2007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되찾으면서 다시 첼시를 누르고 새 전성기를 열었는데 박지성도 그런 맨유의 상승세에 동참했다. 2007~2008 시즌, 2008~2009 시즌, 2010~2011 시즌 등 프리미어리그 우승만 4번을 맛봤으며 리그컵도 3번이나 들어올렸다. 비록 결승전엔 나서지 못했으나 2007~200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메달도 손에 넣었다. 2008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클럽월드컵에서도 시상대 맨 위에 오르고 슈퍼컵 성격인 커뮤니티실드 우승도 두 번 차지하는 등 박지성은 맨유 7년 동안 11번의 정상 등극을 누렸다.


박지성이 지난해 7월 열린 QPR 입단식에서 유니폼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아픔은 박지성 성공의 디딤돌
영광 뒤엔 진한 아픔도 있었다. 그는 고비를 오뚝이처럼 이겨내며 유럽에서 10년간 뛸 수 있었다. 네덜란드 진출 초기엔 홈팬들의 거센 야유가 그를 힘들게 했다. 팬들은 그가 부진할 때마다 가만두지 않았고 마음 고생이 심했던 박지성은 한 때 한국이나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네덜란드에서 승부를 걸기로 결심하면서 그의 인생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무릎 부상은 또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2003년 3월 무릎연골판 제거 수술을 한 박지성은 이후부터 주기적으로 무릎에 물이 차는 증상으로 몸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특히 2007년 4월엔 미국으로 건너가 오른 무릎 외측 연골 재생 수술을 받고 8개월간 재활에만 전념하면서 선수 생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시한폭탄 같은 무릎을 갖고 있으면서도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축구 교도소에 갇혀 산다"를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저했던 자기 관리에 있었다.

2008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첼시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도 그가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 준결승에서 상대 공격수 리오넬 메시를 완벽하게 봉쇄했던 박지성은 결승전에서 퍼거슨 감독의 전술적인 이유에 따라 18명 출전 명단에서 아예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 박지성은 2009년 5월 다시 찾은 결승 무대에서 당당히 선발 미드필더로 나서며 1년 전 아쉬움을 되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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